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
🔖 과학적 탐구란 무엇일까? 언젠가 한국의 트랜스젠더를 대표하는 인구 집단에 대한 데이터가 만들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. 그 데이터를 분석하는 다음 세대의 연구자들은 우리가 쓴 논문들의 대표성이 부족했다고 정확하게 비판할 것이고, 그때에는 2016년 연구비를 구할 수 없어 시민들의 돈을 모아 진행했던 347명 트랜스젠더가 참여한 우리의 연구는 과거의 유물처럼 서문에 인용될 것이다. 연구자로서 그날을 간절히 기다린다. 그렇게 우리를 디딤돌 삼아 더 깊고 풍성한 연구가 세상에 나올 테니까. 과학이 절대적으로 옳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한 시대의 가용한 자원을 활용한 최선의 설명이라고 한다면, 자신 있게 말하건대 우리의 연구는 과학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.
🔖 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.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.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관계에 따라서,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. 그런 합리성은 종종 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. 그러나 역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,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며 판에 균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열어왔다. 많은 경우,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.
🔖 제 학문에서도 거리를 두고 시스템을 관찰하고 보다 냉정하게 분석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. 세상을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면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놓는 과정이 과학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.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생산되지 않은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누군가가 매우 의도적으로 준비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습니다.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나와 내 동료들이 변화가 시급하다고 생각하며 당장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현실이 변화할 가능성은 요원합니다.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럽지만,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과학의 자정능력도 실은 그 구체적인 과정을 바라보면 누군가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안간힘을 쓰며 노력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.
🔖 그런데 저는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순간, 이 책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.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에 맞는 사실들만 모아 말하며 상대 진영을 비난할 수 있는 길을 찾고 끝내면 안 되는 거예요. 사람이 나아가는 건 답이 있어서가 아니에요. 질문을 잃지 않아서 나 아가는 거예요. 중요한 질문들을 놓지 않고 있어서, 삶에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, 계속 갖고 있어서 그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. 자신의 정치적 진영을 옹호하는 수준에서 천안함 사건을 이해하면 그 긴장이 '정리'가 되어버려요. 안심이 되고 편안해지거든요. 그럼 이 책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질문이 되지 못해요.